가사노동을 블럭으로 시각화하면 도움이 되더라구요.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 가장 지친다.
가사노동은 언뜻 보기에 단순해 보입니다. 빨래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쓰레기를 버리고, 재료를 손질하고, 반찬을 만들고… 딱히 고난도의 기술을 요하는 것도, 겉으로 대단해 보이는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이 일을 힘들게 만드는 핵심입니다. 표가 나지 않는다는 것.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고 나면 '나는 도대체 오늘 뭐 한 걸까?' 싶은 날이 많습니다. 분명 부지런히 움직였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는데도 성취감은커녕 피로감만 남는 날들. 그 이유는 ‘일의 성격’ 때문입니다.
가사노동은 대부분의 일이 비가시적이고 반복적입니다. 집안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흩어져 있고, 하고 나면 바로 사라집니다. 오늘 해도 내일 또 해야 하고, 누군가 알아차려주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았던 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일을 시간 블럭으로 나누어 시각화해 보면 정말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쪼개어 가사에 투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일이 얼마나 자주 끊기고 이어지며 몰입을 방해하고 있는지를요.
예를 들어 하루의 타임블럭을 30분 단위로 나눠 노션이나 다이어리에 기록해 보면,
‘설거지 – 15분’, ‘청소기 – 20분’, ‘점심준비 – 40분’, ‘정리 및 수납 – 20분’, ‘분리수거 및 외출 – 30분’ 이런 식으로 10~40분의 작은 블럭들이 하루 내내 끼워져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게 단순히 시간을 잡아먹는 문제가 아니라, 정신을 산만하게 하고, 에너지의 누수를 유발한다는 걸 시각적으로 체감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잠깐 하는 거잖아’로 치부되기 쉽지만, 문제는 바로 그 ‘잠깐’이 하루 전체를 파편화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가사노동은 몸보다 정신을 먼저 지치게 만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찮게 여겨지지만, 정작 이 보이지 않는 일들이 마음까지 침식시킨다는 걸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닫곤 하죠.
시간 블럭으로 나누면 '끊김'이 보인다.
가사노동을 힘들게 만드는 또 하나의 핵심은 바로 끊김입니다. 단절된 시간. 시작은 했지만 끝내지 못한 일, 마무리되지 못한 집안일, 중간에 끊기는 집중. 이 모든 것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마음속에도 ‘지연된 일’들이 쌓이게 됩니다. 바로 이게 정신적인 피로의 근원이 됩니다.
처음엔 그저 청소기를 돌리려고 했을 뿐인데, 아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합니다. 기저귀를 갈고, 물을 먹이고, 장난감을 꺼내주다 보면 청소는 잊히고, 그 사이에 다시 밥 시간이 다가옵니다. 밥을 차리고 먹이고 치우는 일을 마친 후 문득 보면, 청소기는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죠. '아차, 청소하려던 거였지...' 하고 생각하지만, 다시 손에 잡기까지는 또 시간이 걸립니다. 이런 흐름이 반복되면, 뇌는 항상 '해야 할 일'에 둘러싸여 있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날부터 ‘가사노동을 시간 블럭으로 시각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할 일을 목록으로 적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하루 시간표에 그 일을 언제, 얼마나 걸리는지 적어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전 8:309:00 세탁기 돌리기 + 청소기”, “오후 1:001:40 점심 준비 및 설거지”, “저녁 7:30~8:00 주방 정리 및 바닥 닦기” 식으로 말이죠.
이렇게 적어보니 가사노동이 '틈새 시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꽤 큰 블럭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일이 30분 단위로 끊기지 않고, 다른 일과 얽혀 진행된다는 것도 알 수 있었죠. 즉, 가사노동은 하나의 블럭이 아니라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마디’라는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인지하고 나니, 이제는 '왜 이렇게 피곤하지?'라는 막연한 질문 대신,
‘오늘은 중간에 블럭이 너무 많이 끊겼구나’ 하고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피로의 원인을 시각적으로 확인하고 인정하는 일, 그것만으로도 가사노동은 훨씬 덜 억울한 일이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던 나의 노력’을 찾아가는 시간
가사노동을 블럭으로 나누어 기록하고 분석하면서 가장 뭉클했던 건,
그동안 보이지 않던 나의 노력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루를 기록하고 나면 ‘이 많은 일을 내가 해냈구나’라는 감정이 생기고,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내가 내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시선이 생겼습니다.
이전에는 그냥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하고 나서도 ‘당연한 일’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수고한 나 자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넬 틈도 없이, 또 다음 일을 하러 가곤 했죠. 하지만 시간 블럭 속에 그 일을 적어두고, 체크하거나 마킹하는 것만으로도 일의 존재감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요즘 하루가 끝나면 블럭 중 몇 개에 하트 스티커를 붙입니다.
‘이 시간 정말 수고했어’,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어간 나 멋지다’ 하는 의미로요.
작은 시각적 변화지만, 그게 주는 정서적 보상은 굉장히 큽니다.
그리고 블럭을 보면서 느꼈습니다.
가사노동은 단순히 집안일이 아니라, 가족의 하루를 돌보고, 공간의 질서를 만들고, 모두가 쉴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 중요한 역할이라는 걸요. 그 안에서 내가 얼마나 많이 움직이고, 얼마나 세심하게 배려하고, 얼마나 사랑을 담아 돌보고 있는지를요.
가사노동이 힘든 이유는, 우리가 그 일을 ‘일’로 대하지 않고, 단순한 역할 수행으로만 여겨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 블럭을 통해 그 일을 구조화하고 시각화하면, 비로소 그 일이 노동이었고, 성취였으며, 의미 있는 삶의 일부였음을 실감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혹시 가사노동으로 지쳐 있다면 오늘 하루 단 3개 블럭만 기록해보세요.
하루의 시간표 어딘가에서, 보이지 않던 당신의 수고가 뚜렷하게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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